검은 꽃 (출간 20주년 기념 초판본 헤리티지 커버)

판매개시일
2023/08/24
태그
장편소설
검은꽃
김영하
20주년 기념판
문학상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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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검은 꽃』,
숨이 멎을 듯한 대서사시의 결정판을 만나다!
출간되자마자 화제의 중심에 올랐으며, 한 번의 개정을 거쳐 지금까지 50쇄 넘게 찍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2004년 동인문학상 수상 당시 심사위원들로부터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경영을 강렬하게 그린 작품”이며, “올해의 한국문학이 배출한 최고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복복서가판에서는 문장을 면밀히 다듬고 철저한 사실 확인을 거쳐 이전 판에서 발견된 몇 가지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이뿐만 아니라 작가의 결정에 따라 몇몇 주요 장면을 수정해 이전 판과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변모했다. 또한, 책 말미에 남진우 문학평론가의 해설과 서영채 문학평론가의 작품론을 수록해 『검은 꽃』을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1905,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와 기억의 저편으로 스러진 이들을 깨우는 이야기
『검은 꽃』은 대한제국이 “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던 1905년, 좋은 일자리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들의 이민사를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김영하 작가가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직접 다녀온 후 완전히 잊힌 이들의 삶을 힘 있는 언어로 생생하게 되살려낸 대서사시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뜨거운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전반부에는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으로 팔려간 조선인들의 가혹한 삶을 보여주며, 후반부부터는 4년간의 고된 노동에서 벗어난 이들의 후일담을 그려냈다. 『검은 꽃』은 역사적 불운 속에서 안타깝게 저물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김영하의 묘사는 객관적이고 냉철하다. 등장인물들의 덧없는 죽음 앞에서도 그의 어조는 군더더기 없이 담담할 뿐 슬픔을 쥐어짜지도 감상주의에 젖지도 않는다. 이러한 간결하고 냉철한 작가의 어조는, 이 이야기의 목적이 단순히 민족 수난사의 일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남진우 문학평론가는 이에 관해 “이 작품의 지남침은 (…)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이 걸어와야 했던 여정에 대한 성찰에 놓여 있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검은 꽃’이라는 제목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검은 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이에요. 검은색은 모든 색이 섞여야지만 가능한 유일한 색으로 남녀노소, 계층, 문화, 인종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꽃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겠죠.” ‘검은 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를 갈망하다가 결국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스러져버린 이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조화弔花’일 것이다.
책속에서
그들은 아주 멀리에서 왔다. 입속에서 굵은 모래가 서걱거렸다. 벽이 없는 천막으로 마른바람이 불어왔다. 떠나온 나라에선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_12
사방 어디에도 산이 없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유카탄의 석양은 느지막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일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평생 지평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이 벌판의 황막함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과 산 사이에서 태어나 산을 바라보고 자랐으며 산등성이로 지는 해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음을 깨달았다. 넘어갈 아리랑고개가 없는 끝없는 평원은 그야말로 낯선 풍경이어서 사람들은 딱히 바닥이 딱딱해서라기보다 지평선이 주는 막막함과 공허로 뒤척였다. _103
어째서? 김이정이 물었으나 장윤은, 그런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투로 반문했다. 그럼 우리가 그들의 지배를 받으란 말인가? 이정은 지지 않고 따졌다. 어째서 반드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자코 있던 박광수가 힘없이 말했다. 왜냐고? 우리가 사라질까봐 그러는 거야. 우리는 소수고 마야인들은 셀 수 없이 많지. 그들과 섞여 종내는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봐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우린 어차피 모두 죽어. _341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들을 설득한 건 논리가 아니라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_347